‘구형’이 되어버린 소년과 로봇의 이야기 “밖으로 세상을 보러 가자, 우리 같이.”
푸른문학상 수상 작가 김영리가 자신만의 세계관이 담긴 특별한 청소년 SF로 돌아왔다. 우리가 머지 않아 맞닥뜨리게 될 세상을 미리 들여다보고 온 듯, 작가는 로봇과 유전자 조합이 보편화된 미래 시대에 생길 수 있는 사회적 문제와 소외된 이들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아이 로봇을 학대하는 것은 아동 학대에 해당하는가? 유전자 조합은 자연 법칙에 위배된 것인가? 시대에 뒤처진 ‘구형’은 퇴출되어야 하는가? 청소년SF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들이 시대를 날카롭게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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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중요하다. 세계관을 확인하는 것은 더 중요하고. 질문으로 내 편과 적을 구분해야 한다. 적을 내 편으로 오해하면 주인공이라도 비명횡사할 수 있으니까. 보통 위기에 빠진 주인공의 미래는 둘 중 하나로 갈린다. 비장하게 죽음을 맞거나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거나. 둘 다 달갑지 않다. 타인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 발생하는 위기를 피하려면 질문이 필요하다. 열다섯은 세계관을 정립하는 질문을 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나는 열다섯 하고도 2분의 1이 지났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내가 특별한지 아닌지는 세계관에서 결정이 난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나와 남을 나눌 꼭 맞는 질문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날은 세 가지 질문을 드디어 결정한 날이었다. 로봇을 얼마나 처리했는가. 유전자 조합 인간을 싫어하는가. 왜? 그로부터 며칠 뒤 뜻밖의 녀석을 만나면서 나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 p.12
“네가 로봇 도둑 맞지? 훔쳐간 로봇 어쨌어?” 확신에 차서 냅다 날린 질문이었다. 팔았냐, 얼마 받았냐, 누가 시킨 거냐 연이어 그물 같은 질문으로 공격하려는데, 로봇이 순순히 대답했다. “땅에 묻어줬어.” 로봇은 눈만 보이고 입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코와 입이 있어야 할 부분이 우산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철제 마스크 모양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온몸이 울려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아이에 가까웠다. 성별을 구분하자면 남자 쪽이었고. “로봇이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건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로봇의 팔을 잡았다. 로봇은 놀란 눈이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잠시 몸을 움찔했을 뿐. 나는 녀석의 손목을 뒤집었다. 팔다리가 있는 로봇들은 손목 안쪽에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으니까. 그런데 일련번호가 지워져 있었다. 라이터 불로 지진 것 같은 조잡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로봇은 결코 자신의 일련번호를 스스로 지울 수 없었다. 역시, 뒤에 누가 있었다. “누가 이랬어?” “…….” --- p.43~44
유전자 조합을 하지 않은 인간과 구형 로봇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나에 대한 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구형 로봇은 단속 대상이다. 서울시에서는 구형 로봇의 방치가 도시 슬럼화로 이어진다며 올해 초부터 구형 로봇을 발견 즉시 수거해서 폐기 처분했다. 도시 미관 개정법에 따른 조처였다. 할아버지가 말한 불꽃 축제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 세워진 로봇파크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 그 축제에 구형 로봇은 절대 함께할 수 없었다. 세계관은 중요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하니까. 이 로봇을 만나면서부터 나의 세계관은 흔들리고 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세계관을 증명하거나 잘못된 세계와 싸우거나. “너는 여기 계속 숨어 있을 수 있어. 더 지내보면 알겠지만, 공장 아저씨들은 진짜 좋은 분들이야. 할아버지도 무뚝뚝하지만 약속은 꼭 지키는 분이고. 네가 이 창고가 좋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그게 아니면…….” “아니면?” 나는 몸을 낮춰서 로봇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밖으로 세상 보러 가자. 같이.” --- p.73~74
“사랑받는 게 부러워. 이 건물도, 너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공장 아저씨들이랑 할아버지 모두가 널 사랑하잖아.” “사랑은 무슨, 할아버지가 얼마나 무뚝뚝한데. 아저씨들은 내가 양말도 챙겨주고 냉장고에 커피도 넣어 놓으니까, 그냥 그런 거지.” “너도 아저씨들이랑 할아버지를 사랑하는구나? 그런 게 사랑이구나.” 미래는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긴 채 혼잣말했다. 선글라스, 마스크, 모자, 장갑 등으로 완전히 가렸는데도 쓸쓸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엄마 말이야. 날 정말 사랑한 걸까?” “그 여자는 널 때렸어. 그건 사랑이 아니야.” “늘 때리지는 않았어. 가끔 너무 힘들면……. 때리고 나서는 늘 나를 안아줬어.” “안아주고 나서는 토닥토닥하면서 귤도 줬어? 조물조물 맛있어져라 주문도 외우고?” 나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미래는 왜 여기까지 와서, 경복궁을 보고 감탄하는 순간에도 그 여자 이야기를 하는 걸까. 미래는 그 여자에게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로봇이든 다른 대상한테 화풀이하는 건 나쁜 거야. 그건 너도 알잖아. 그래서 도망쳐 온 거 아니야?” “만약에 말이야, 내가 더 잘했으면 달라졌을까? 내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똑똑하고, 진짜 아이처럼 귀엽게 생겼다면.” --- p.100~101
“저 건물은 왜 해체하는 거야? 노후화돼서?” “이 주변이 다 고층인데 저 건물만 5층 높이여서 해체한다고 들었어.” “경복궁도 높이가 낮잖아. 저 건물보다 훨씬 더 오래됐고.”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이지만, 저 패션디자인센터는 아니야.” “사적은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 거야?”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설을 국가가 법적으로 지정한 문화재라는데,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것도 편집 때 더빙을 해야겠다. ‘모르겠다’니 너무 무책임한 말이다. 입으로 뱉은 말을 하나하나 검열하듯이 머릿속으로 되새김질했다. “법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정하지 않으면 모두 저렇게 사라지는 거야?” 미래의 눈은 해체 공사가 진행 중인 패션디자인센터에 못 박혀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과 그렇지 못한 건물. 법이 바뀌면서 사라져야 할 로봇과 새롭게 만들어지는 로봇. 어쩌면 저 건물 역시 구형이어서 해체되는 게 아닐까. --- p.122
“우리 집엔 비글이 있어. 인간을 위한 의약품을 만들려고 생체 실험을 당하다가 구조됐어. 그딴 건 시대가 변해도 그대로야. 로봇도 생체 실험을 대체할 순 없으니까.” 해림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구형 로봇은 새로 바뀐 도시 미관법 때문에 수거 후 폐기되지. 실은 장소만 지하 물류 터널로 옮겨져서 파손될 때까지 일하는 거지만. 신식 로봇과 구형 로봇의 차이가 뭔데? 차이가 있다고 치자. 그게,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인가.” 나는 감정이 복받쳐서 입을 닫았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로봇처럼 인간도 구형과 신식으로 나뉜다면, 생체 실험을 해도 되는 인간과 보호할 인간으로 나누겠지. 보호할 인간과 보호할 가치가 없는 인간. 대체 그걸 누가 결정하는 건데?” --- p.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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