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당의 딸과 몰락한 양반가 아씨의 운명을 넘어 새 삶을 찾아가는 여정! “이제부터는 내가 내 운명을 이끌 것이다”
『시구문』은 조선시대에 시신을 내어가던, 죽음과 삶의 순간이 어우러진 시구문(광희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넘어 새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아이들의 여정을 담고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인조 시대, 백성들의 어려웠던 삶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다.
이 책에는 세 명의 아이가 등장한다. 무당인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고 원망하는 기련, 편찮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책임지는 소년 가장 백주, 누명으로 몰락한 양반가의 소애 아씨. 어느 시대나 청소년들의 삶은 불평등하고 아프듯이, 이들 역시 괴롭고 힘든 삶을 이겨내려 애쓰지만 각자의 발목을 움켜쥔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제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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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서울에서 태어났다. 지나치기 쉬운 누군가의 마음에 대해 오래도록 쓰고 싶은 소망이 있다. 2017년 계간 [어린이와 문학] 청소년 단편소설을 통해 등단했고, 202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시구문』은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목차
도망치는 방법 누구에게나 있는 것 때 묻지 않은 하나 다시 만난 날 어제와 다른 오늘 김 대감 집 위험한 짓 백주 문밖으로부터
『시구문』 창작 노트
책속으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무당이 되는 내림굿을 받고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또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방 잡아먹은 년.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내뱉는 말은 너무나도 험악하고 적나라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와 어머니에게 더 심한악담을 할 수 있을지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여편네 기가 세니 남자가 숨이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소문의 시작은 어머니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의 가벼운 입놀림에 진절머리가 났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싶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부아가 치밀어 동네 사람들을 기어코 들이받는 일이 생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다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 이유는 소문과 악담이 방향을 바꾸어 나에게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신내림은 대를 통해 전해진다는데, 딸년도 제 어미 인생 따라갈 거 아냐. 사람들이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 pp.26~27
“자네, 들었나? 오늘 관철동 근방에서 참수가 있었다네. 양반네를 참수하는 것도 실로 드문 일이 아닌가. 그 가문이 대대손손 어떤 집안인가. 삼대를 멸하게 생겼으니. 게다가 함께 직언했다는 이유로 몇 사람이나 더 시구문 밖으로 내쳐지게 생겼더군.” 그 남자는 술 한 사발을 한 번 더 들이키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임금이 쥐새끼처럼 도망을 갔다 결국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쯧쯧.” (…) “이보게. 목소리 좀 낮추지 그러나.” “아니, 임금은 백성의 지아비 아닌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몇 명이나 목숨을 잃었나. 그래놓고는 바른말 하는 신하를 기어코 역모로 몰다니. 허허.” 말을 마친 남자가 손으로 머릿고기를 집어 한입에 털어 넣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 정묘년 때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쳐서 어떻게 되었나. 결국 후금한테 명분도 실리도 다 주지 않았는가. 이러니 선대왕이 백성들 입에 회자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 이 말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맞은편 남자가 술 한 사발을 들이켜더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큰소리를 쳤다. “역모를 갖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모자라, 폐위된 선대왕을 옹호하는 말을 하다니. 이러다 자네가 시구문 밖으로 내쳐질 일이야.” --- pp.66~67
“언니, 난 어머니를 모르잖아. 근데 어머니는 내 마음속에 살고 계셔. 몰랐지?” “그랬어? 그거 정말 깜짝 놀랄 비밀이구나?” 백희가 비밀이라는 말에 킥킥 웃었다. “내가 넘어지면 덜 다치게 해주시고, 내가 밤에 뒷간에 갈 땐 무섭지 말라고 노래도 불러주셔. 그리고 언제나 내 옆에 있다고 말해주…….” 백희가 종알거리던 입을 멈추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지금도 백희의 어머니는 백희가 잠들 수 있게 노래를 불러주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잠들 수 있으리라. 나의 아버지도 몸은 여기에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살아 계신다. 사람의 기억이란 지나간 사람의 기억을 이어 붙여 또 끝끝내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육신이 여기 없어도 그 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 기억 속에 함께 이어져 있다. 그 진실을 나에게 일깨워준 건 어린 백희였다. --- pp.122~123
“어머니가 이리 되신 게 저 때문인가요?” 드디어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어머니의 대답이 나를 아주 오래 힘들게 할 것을 예감했지만 이런 나와 달리 어머니에겐 작은 두려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련아, 그저 이 삶은 나의 몫일 뿐이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어머니가 내 두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기꺼이 내 짐을 짊어졌는데도 이제껏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매 순간마다 내 옆에 있었던 건,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떠나는 사람은 가볍게 가는 거야. 그래야 좋은 길로 간단다.” 이 세상에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단 한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사실을 넘어선 진실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외에 다른 어떤 진실이 필요했던 걸까. 무엇이 더 필요해서 어머니와 나 사이를 괴롭혔을까. --- p.166
백희가 내 손을 잡았다. “언니,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어디든.” 백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이제 뭐 해?” 나는 백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아야지.” 아씨도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셋은 서로의 손을 잡고 파란 하늘 안에서 자유롭게 흩날리는 댕기를 바라보았다. 살아가는 내내 기억해야 했다. 앞으로의 삶이 힘들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문밖의 길을 내어준 어머니와 백주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운명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닌, 내가 운명을 이끌어보겠노라 다짐했다.